토인비는 바울을 태운 배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그곳의 역사와 문화가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영향력은 그만큼 대단했습니다. 우리는 바울 변화의 힘을 예수와의 만남에서 찾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나고 핍박자에서 전도자가 됩니다. 하지만 바울의 변화에는 그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는 태도의 변화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한 일이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입니다.
그는 다시 보게 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눈이 열립니다. 삶은 보이는 만큼 느끼고 그만큼 성장합니다.
목사는 설교를 할 때 그 준비 과정에 엄청난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그것은 목사가 평생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그런데 설교를 할 때 현장이 주는 힘이 있습니다. 50을 준비했는데 현장에서 100이 되는 경우가 있고 100을 준비했는데 현장에서 50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현장에서 경험하는 것은 눈입니다. 말씀을 전 할 때 청중이 시선을 주면 에너지를 얻습니다.
시선을 주지 않으면 에너지를 잃곤 합니다.
또 청중을 보는 강단의 눈이 있습니다. 청중이 시선을 주지 않을 때 어떤 생각이 들어옵니다. “피곤한가 보다. 교회에서 졸면 그것도 은혜다...” 이런 마음을 품으면 말씀은 에너지를 잃지 않습니다. 그런데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또 눈을 감네...” 이때는 에너지를 잃게 됩니다. 여기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시험은 환경에서 오는 것 같지만 실상은 내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힘과 에너지는 달라집니다.
모두 다 돕는 자로 서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삶의 현장에는 돕는 조언과 괴롭히는 간섭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어떤 사건을 만날 때 돕는 마음으로 조언을 하지만 그 조언이 상대에게 받아 들여 지지 않을 때를 만납니다. 그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또 가까운 이웃이면 실망과 괴로움을 느낍니다. 그럼 그때부터 조언은 간섭이 됩니다.
조언을 하는 것은 자신의 영역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타인의 영역입니다.
상대가 자신의 좋은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괴로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나의 영역입니다.
내가 힘들어지는 것은 타인이 조언이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그것에 괴로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을 느낀다면 간섭이 됩니다. 우리는 환경을 경험하는 것 같지만 실은 내 안에서 느끼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you가 아니라 자신을 향한 I 메시지이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고 다시 보게 하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이때 바울이 다시 본 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신입니다.
그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확신이 있었고 그래서 부활의 도를 전하는 그리스도인을 핍박했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체험하고 충격을 받습니다. 먹지도 않고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주님”을 체험합니다.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경험한 것은 자신을 다시 보는 눈입니다. 성령이 인도하는 삶입니다. 여기서 그의 삶은 박해자가 아니라 전도자가 됩니다. 영향력을 행하는 대 사도가 됩니다.
관련 말씀
다시 보게 하시는 하나님 https://youtu.be/lxYVe3kdYbM